
제2의 경부고속도로 사업이 다가오고 있다.
휴전선을 지나서 북한을 가로질러....러시아와 몽골 그리고 중앙아시아까지 연결되는
대규모 토목사업이 이제 시작될 것이다.
물론 그 상황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은 이 영상시점보다 훨씬 훌륭하게 완수할 것이 확실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okXFG2j9Wvs
📌 세계가 비웃던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 '선개통 후보완' 무리수가 신의 한 수가 된 이유는?
초고속 경제 성장에 필수적인 인프라였음에도 예산과 기술, 장비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먼저 개통하여 물류 혁명과 산업 발전을 이끌고 추후 보완하는 '선개통 후보완'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입니다.
💡 '선개통 후보완' 전략으로 어떻게 난관을 극복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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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부족: 휘발유세 인상, 최소 공사비 원칙(갓길 폭, 도로 높이 축소)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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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및 장비 부족: 해외 중장비 대량 수입 및 자체 제작, 조강 시멘트 개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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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단축: 돌관 공사, 프라임 코팅 양생 시간 단축, 야간 작업(노래자랑) 등으로 2년 5개월 만에 완공.
이 콘텐츠는 1960년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숨겨진 이야기를 탐험합니다. 세계가 비웃었던 계획을 '선개통 후완비(先開通後完備)'라는 과감한 전략과 수많은 난관 속에서 자체 기술 및 장비 개발로 극복한 기적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 기록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희생과 헌신을 감수했던 도전 정신의 실체를 담고 있어, 현재 마주한 어떤 난관을 해결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는 현장 중심의 문제 해결 인사이트를 얻게 될 것입니다.
1. 경부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의 시작과 초기 준비 (1960년대)
1.1. 경부고속도로 기초 작업 및 지도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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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건설 준비 조직 구성: 청와대 307호실에서 육군 장교 세 명과 건설부 직원 한 명으로 이루어진 청와대 파견단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기초 작업을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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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확보의 어려움: 첫 임무는 고속도로의 기초 노선을 확정하기 위해 5만분의 1 축적 지도를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서울에서 부산 간 전 지역의 지도를 구입하는 것 자체가 어려움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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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취합 및 조합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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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도엽 번호를 찾아 당시 시중에 있던 지도를 모으고 부족한 부분은 기도서 등으로 보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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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진 지도를 번호에 맞춰 하나하나 이어붙이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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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으로 확보된 5만분의 1 축적 지도는 반도 남쪽 전체에 해당하며 그 넓이가 18평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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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지시와 지도 채색: 대통령이 지도를 보고 흑백 지도만으로는 산맥이나 지형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색칠 작업을 지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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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고선 채색 작업: 전국에서 미술을 전공한 ROTC 장교들이 육군본부 공병감실로 소집되어 등고선 채색 작업에 매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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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5일간의 작업 끝에 5만분의 1로 축소된 한반도 지도가 완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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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노선 확정 및 건설 필요성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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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 확정 원칙: 완성된 지도 위에서 노선을 확정하는 작업이 남았으며, 확정 시 서울과 부산 간 최단 거리를 유지하되, 공사비가 많이 드는 난공사 구간은 피하는 것이 원칙에 포함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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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 확정 담당: 미국에서 고속도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박종생이 노선 확정 작업을 담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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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필요성 제기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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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부터 시작된 월남 파병과 외국 차관 도입으로 공업 분야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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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울산공업단지 등 1, 2차 경제개발계획 성과로 급격한 경기 성장이 있었으나, 수송 수단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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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산업으로서 도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IBRD(세계은행) 조사에서도 한국의 중공업 발전을 위해 고속도로, 항만, 공업단지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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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 확정: 이로써 서울에서 부산 간 428km 전 구간의 노선이 확정되었다 .
1.3. 예산 확보와 공사 시작의 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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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확보의 불확실성: 대규모 사업 경험이 전무했던 정부는 총 예산을 얼마로 잡아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려웠으며, 유관 기관들의 공사비 예치관도 650억에서 180억까지 천차만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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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비 확정 및 토지 매입: 정부는 태국에서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던 현대건설의 예비안을 참고하여 공사비를 300여억 원으로 정하고 토지 매입을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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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매입가는 평당 300원에서 좋은 밭은 600원을 주고 매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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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조사단 구성 및 설계: 12월 고속도로 기획 조사단이 꾸려지면서 진행 속도가 빨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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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사단은 청와대 파견단원들과 민관군 건설 전문가 50명으로 구성되어 설계와 예산 확보 등 실무를 담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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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생이 도로 설계를 담당했으며, 공사비 절감을 위해 갓길 폭을 50cm 축소하고, 도로 높이도 평균 3m에서 2m로 1m 줄여서 설계하는 최소 공사비 원칙이 적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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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 확보 노력과 반대 여론: 가장 큰 문제는 예산 확보였으며, 야당은 고속도로 투입 자금을 다른 경제 분야에 지원하는 것이 낫다고 공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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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을 세금으로 충당하기 위해 휘발유세 인상안을 2분 만에 날치기 통과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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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공사 기공식이 다가오면서 반대 여론이 높아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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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의 부정적 반응: 세계은행은 현 시점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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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돈 있는 사람들만 자가용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비판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1월 20일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국가 역량을 안보에 집중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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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의지 표명 및 착공: 정부는 기술, 자본, 노력으로 이뤄내겠다는 의지를 확보하며 강한 결의를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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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반대 여론이 더 많았으나 정부는 '절대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역사적인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 시공에 착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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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1일 서울-수원 간 시범 구간을 시작으로 경부고속도로 428km 대장정이 막을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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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범 구간 공사와 장비 확보 및 자체 개발 노력
2.1. 초기 공사의 어려움과 장비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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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 구간 시공 주체: 시범 구간은 육군 공병단과 태국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던 현대건설이 담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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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현장 상황: 당대 최대 토목 공사라는 수식어와 달리 시작은 초라했으며, 낡은 중장비와 사람의 노동으로 진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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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공사 구간 배치: 난공사가 예정된 시범 구간에는 태국 고속도로 건설을 지휘했던 정대수를 현장에 배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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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공사 난관: 2월에 한파가 맹위를 떨쳤고 삽괭이로는 얼어붙은 땅을 상대하기 어려웠으나, 공사 기간 때문에 장비가 오기를 기다릴 수 없어 겨울에 기공식을 하고 공사를 강행했다 .
2.2. 마을과의 마찰 및 공기 단축을 위한 특단의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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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당 나무 제거 문제: 마을마다 하나씩 서 있는 당산 나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과 업체 간에 실랑이가 전 구간에서 계속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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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신령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고사를 지낸 후에야 고목을 제거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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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단축 및 현대건설의 선택: 토공에서 포장까지 주어진 시간은 단 10개월이었고, 이대로는 준공이 불가능하여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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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은 공사 현장에 기계화를 선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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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내에 있던 총 1,400대의 중장비보다 많은 1,900대(800만 달러 상당)의 중장비를 수입하여 현장에 투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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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장비 투입 후 작업은 밤낮없이 불도저처럼 밀고 나갔으나, 기초공사 마무리 단계에서 진동 롤러가 부족한 문제가 발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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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 롤러 자체 제작: 이미 대량 장비를 수입한 현대에는 추가 수입이 무리였고, 김영주 상무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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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공사는 한국의 3배 정도 규모였기에 태국에서 썼던 장비를 데려올 수 없어, 진동 롤러 1대를 구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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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상무는 아도자동차(현대자동차의 전신)의 기술력을 활용해 진동 롤러를 직접 해체하고 부품을 제작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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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만은 자체 제작이 불가능했고, 쉽게 구할 수 있고 분석이 용이했던 정주 엔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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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 엔진을 장착한 10대의 진동 롤러 덕분에 토공의 마지막 작업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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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 작업 시작: 드디어 1968년 8월, 정부 고속도로 착공 이후 최초의 포장 작업이 시작되었다 .
3. 포장 공사의 혁신과 희생적인 노력
3.1. 프라임 코팅 양생 시간 단축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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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 과정: 포장은 토공이 끝난 도로 위에 기층물을 다지고, 그 위에 피니셔를 이용해 균일하게 아스팔트를 포에 마무리하는 과정이며, 각 과정에는 접착을 돕는 코팅 과정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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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 코팅 안정화 문제: 기층과 표층의 접착을 돕는 프라임 코팅은 코팅액 살포 후 최소 48시간을 안정화해야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었는데, 공사 현장에서는 48시간이 너무 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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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문의 아이디어: 아이디어 회의 끝에 정찬문이 책임을 맡아 프라임 코팅을 따라 아스팔트 포장제를 얇게 살포하는 방법으로 양생 시간을 단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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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식은 48시간을 기다릴 여유가 없어, 프라임 코팅 후 2cm 정도의 웨어링(아스팔트 콘크리트 포장제)을 추가 포장하는 방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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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프린터 고장 문제: 아스팔트 프린터 고장으로 기계가 멈추면 포장 공사도 멈췄고, 재가동까지 수백 명의 인부들을 대기시켜야 했으며, 이로 인해 새벽 3~4시까지 작업이 이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
3.2. 인부들의 헌신과 개인적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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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자랑을 통한 대기 인부 관리: 살림하는 주부 인부들의 항의가 거셌으나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중공에 차질이 생기기에, 고심 끝에 노래 자랑을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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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노임이 350원인 시절에 1등 상금 5,000원(15배)을 걸자, 대부분의 인부가 한밤중까지 자리를 지켜 공사를 무사히 진행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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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직원들은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하며 큰 부담과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중공 자체의 차질을 막기 위해 헌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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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문의 개인적 희생: 정찬문에게 만삭 아내의 출산 전보가 도착했으나, 확인했을 때는 아이가 태어난 지 4흘이 지난 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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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보호자 없이 혼자 첫 아이를 출산했으며, 정찬문은 가장으로서 구실을 못했다는 자괴감을 느꼈으나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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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희생: 간부, 기술자, 인부 할 것 없이 모두가 공기 내 완공을 위해 개인과 가족을 희생하고 있었다 .
4. 시범 구간 개통과 이어진 난관, 그리고 롤러 사건
4.1. 공사 감독관과의 마찰과 서울-수원 구간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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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관 임명과 테스트 업무: 준공식이 다가오며 현장이 바빠진 가운데, 공사 감독관이 롤러 앞에 드러누워 공사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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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기공 한 달 전 이혼의 육군사관학교 출신 예비역 장교들을 감독관으로 임명했으며, 황흥석도 그중 한 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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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관의 주요 업무는 시방서 준수 관리와 포장 샘플 채취 테스트였으며, 불합격 시 포장을 걷어내고 재시공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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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업체와 감독관의 갈등: 적은 돈으로 짧은 기간에 공사를 마쳐야 하는 시공업체와 선진국 수준의 품질을 요구하는 감독관 사이에 마찰이 발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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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흥석의 원칙 고수: 젊은 감독관 황흥석에게 타협은 없었으며, 그는 "시방서대로 안 되면 몸으로 부딪쳐야 한다"는 정신으로 롤러 앞에 누워 공사 품질을 확보하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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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수원 구간 개통: 드디어 착공 10개월 만에 서울-수원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
5. 수원-오산 구간 마무리 공사의 극한 도전
5.1. 촉박한 공기와 혹한 속의 공사 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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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공사 압력: 수원 시범 구간 성공 후, 정부는 수원-오산 간 14.2km 구간을 연내 완성하라고 지시했으며, 당시 공정률은 겨우 50%에 불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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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기상 조건: 오랜만에 내린 눈이 포근하게 내렸으나, 폭설까지 겹쳐 현장은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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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공 예정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열흘이었고, 우선 눈을 치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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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도로 녹이기 시도와 실패: 눈을 실어낼 수 없어 도로 위에 짚단을 깔고 경유를 이용해 불을 붙여 도로를 녹인 후 곧바로 포장하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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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짚이 다 타지 못하고 제가 남아서 상황은 더 나빠지는 대실패로 끝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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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실패했지만, 성취하려는 노력 자체는 깊이 평가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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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 도색 작업: 개통식 시간에 맞춰 포장은 끝났으나 차선 도색 작업은 전혀 되지 않아, 개통 세 시간 전에야 전임부가 매달려 도색을 마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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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오산 구간 개통: 12월 30일 수원-오산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한국 사회에 고속도로라는 새로운 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6.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와 '선개통 후완비'의 한계
6.1. 태풍 및 집중호우 피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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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인 폭우 피해: 평화롭게 잠든 9월 13일 새벽, 중심 초속 약 20m의 강풍과 함께 쏟아진 폭우로 인해 750명의 사상자와 엄청난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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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구간 피해: 고속도로 공사 구간도 예외는 아니어서 곳곳에서 산사태(사태)가 발생했고, 일부 구간에서는 슬라이딩 현상도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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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압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흙이 쏟아져 내리는 슬라이딩 현상이 우기 내내 계속되었고, 설계자를 질책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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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태로 인해 도로 가운데 나무가 옮겨져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으며, 감독관들은 고사를 잘못 지내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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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흥석의 인명 구조와 인부 실종: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9월 13일, 인부 막사를 순찰하던 황흥석은 깜짝 놀랄 상황을 맞닥뜨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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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더미와 함께 굴러떨어지는 바위에 세 명의 인부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고, 커피 로프를 구해서 물에 뛰어들기까지 불과 10초가 걸렸으나, 이미 다른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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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흥석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으나, 이 흙더미로 인해 인부 11명이 실종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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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찍 구했으면 살릴 수 있었을 거라는 미안함을 항상 기억하고 있으며, 당시 상황은 처참하여 건설 중인 교량이 무너지고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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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통 구간 피해: 이미 개통된 오산-천안 간 구간에서도 폭우로 아스팔트가 갈라지고 도로 곳곳이 움푹 파이는 피해가 발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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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문은 시공 당시 예상했던 문제점들이었으나, 보수 공사로 인해 시공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으며, 기술을 무시하고 일정과 목적에만 치중한 '허수아비'가 아닌지 자괴감을 느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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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선개통 후완비'의 귀결과 한국도로공사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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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과 논란: 경부고속도로 건설 막바지에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이 발생하면서 경부고속도로는 부실과 논란에 휩싸였는데, 이는 '선개통 후완비(先開通後完備)' 원칙으로 건설된 고속도로의 한계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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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로공사 창립과 보수: 정부는 준공 다음 해에 한국도로공사를 창립하고 고속도로 보수를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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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나중에 보완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낫다는 경영 마인드 접근이 현실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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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대구 구간만 남음: 1969년 12월, 서울-대전 및 대구-부산 구간이 완공되면서, 입지 조건이 가장 어려웠던 대전-대구 구간의 공사만 남게 되었다 .
7. 최대 난공사 구간, 당재터널 공사의 기적
7.1. 당재터널 초기 난관과 돌관 공사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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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재터널 위치 및 측량: 구름도 쉬어간다는 추풍령에 위치한 당재터널은 최대 난공사 구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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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량을 위해 옥천군에 도착한 심한식 대위는 차 한 대도 지나갈 수 없는 첩산에서 할 말을 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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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 도로 부재: 당시 공사비 절감을 위해 장비 이동을 위한 가설도로 비용이 없었기 때문에 측량 장비를 소달구지에 싣고 추풍령 고개를 넘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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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설계의 문제점: 일반적인 터널은 우수한 암질 산 가운데로 내지만, 당재터널은 길이와 비용 최소화를 위해 계곡에 설계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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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지층이 퇴적암이라 하루 진도가 최대 2m, 나쁜 날은 30cm에 불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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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낙반 사고: 20m를 파갔을 때 암반이 무너져 인부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했으며, 착공 직후부터 낙반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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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재터널에서만 11명이 사망할 정도로 작업 환경이 열악해지자 인부들이 떠나가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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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임금의 두 배를 제시했으나 인부 확보가 어려웠으며, 당초 준공 예정일(69년 12월)을 넘겨 2월이 되도록 상하행선 어느 곳도 뚫리지 않아 전체 개통일 맞추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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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특공대 투입: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활약했던 인력으로 특공대를 결정하여 당재터널에 파견했고, 양봉웅이 이들을 지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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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공대는 잃어버린 공사 기간을 만회하기 위해 돌관 공사를 선택했는데, 이는 터널 내에 가갱도를 뚫어 마주 보며 공사하는 방식으로 능률은 높지만 위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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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갱도를 뚫어 작업 면적을 4~6개로 넓혀 거꾸로 나오는 식으로 작업했고, 새로운 장비와 전국에서 모인 인부들이 투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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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행선 개통: 1970년 5월, 드디어 하행선이 개통되었다. 터널 공사 시작 후 1년 만의 성과였으며, 심한식 대위와 모든 인부들이 환호하며 기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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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행선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으며, 6월 30일까지 100m 이상의 구간을 개통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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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6월 30일 개통을 위한 초단축 공법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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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구간 공정 비교: 반면 낙동강 조는 6월 30일 준공을 목표로 무리 없이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언론은 당재터널 개통을 낙관적으로 보도하는 반면 현대 특공조는 초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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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 주기의 문제: 터널 개통의 관건은 폭파였으나, 보통 터널은 폭파 후 병행 시멘트를 바르고 대략 일주일(약 7일)을 기다려 다음 폭파를 진행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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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기간은 8주였으므로, 8번의 폭파로는 남은 구간 개통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전문가 진단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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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빠르면 내년 3월, 연말 이전에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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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봉웅과 정주영 회장의 담판: 양봉웅 사장은 정주영 당시 현대건설 사장과 단판을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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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장은 조강 시멘트(일반 시멘트보다 빨리 굳고 강도가 좋은 시멘트) 생산을 건의했고, 정 회장은 조강 시멘트 생산이 가능하다면 하루에 작업을 끝낼 수 있는지 확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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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장은 조강 시멘트를 사용하면 일반 시멘트보다 하루 만에 작업이 끝나며, 6월 30일에 끝낼 수 있다고 확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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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개통 후완비' 전략의 극대화: 양봉웅 사장은 철도 의존 시 시멘트 생산 및 운반이 어려우므로 단양 공장에서 육로로 운반해 줄 것을 건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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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조강 시멘트, 육로 운반)가 해결되면 자신 있냐는 재확인에 "틀림없이 하루 만에 끝난다"고 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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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공사 완공을 위해 적자를 보더라도 기간 내 공사를 마치기로 선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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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관 공사 성공: 1970년 5월, 조강 시멘트 도착과 함께 터널 발판 작업은 일주일 1회에서 하루 1회로 단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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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 시멘트로 인해 일주일 강도가 하루에 나오면서, 남은 공기가 28개월 단축될 것으로 계산되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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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부도 두 배가 투입되어 터널 안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매달렸고, 22일을 지나 25일째 되는 날 마침내 상하행선 터널 구간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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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6월 27일 밤 11시, 양봉웅은 정주영 사장과의 약속을 지켜 준공 예정일보다 3일 먼저 상행선을 개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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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경부고속도로 준공 및 그 의의
8.1. 준공과 사회적 파급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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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준공: 1970년 7월 7일 서울에서 부산 간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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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공한 지 2년 5개월 만에 우리 손으로 이룩한 고속도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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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사는 국민들의 민족적 저력과 역량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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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권의 변화: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우리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서울에서 아침을 먹고 부산에서 점심을 즐길 수 있게 되어 한양 천 리가 멀다는 인식이 옛말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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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까지 천 리 길이 7시간으로 단축되어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좁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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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성장 동력: 고속도로 건설로 인한 물류 혁명은 석유화학, 철강, 건설산업 등 공업 분야의 성공을 도왔으며, 한국이 공업 국가로 빠르게 변모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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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는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 관광의 기적을 넘어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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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험은 이후 겪어야 할 많은 고난과 어려운 일들을 자신감을 가지고 해결하는 동력을 제공한 단초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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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건설의 의미와 현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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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되는 고생: 화려함보다는 그 고생했던 기억이 주로 남아있으며, 이는 월드컵 때 응원하던 인파가 흩어지듯, 책임자부터 인부들까지 2년 반 동안 헌신했기에 가능했던 역사로 평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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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고속도로망: 제1 고속도로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시작으로 현재 대한민국에는 총연장 2,800km의 고속도로망이 국토를 누비며 뻗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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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 경부고속도로는 성전을 위해 선택한 우리 민족의 꿈이었으며, 우리 경제를 지키는 이 혈관이 막힘없이 뛰는 한강의 기적은 과거가 아닌 오늘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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