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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대통령의 7가지 리더십

by 아이러브비즈니스 2010.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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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대통령의 7가지 리더십

데이비드 거겐 지음/서율택 옮김

스테디북/2002년 3월/511쪽/18,000원

▣ 저 자 데이비드 거겐

1942년 미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예일대학과 하버드 법과대학원을 졸업한 후 30여 년간 대통령 보좌관 및 세계적인 뉴스 잡지의 편집인, 탁월한 뉴스 해설가, 그리고 교수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공보보좌관으로 백악관 근무를 시작한 이래 제럴드 포드의 백악관에서는 특별보좌관 및 수석공보관으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는 공보보좌관 및 업무조정관으로 대변인실과 집필단을 지휘했다. 빌 클린턴 시절에는 백악관에서 대통령 고문 및 공보담당 참모로 일했다. 현재 하버드대학 존 케네디 행정대학원 교수이자 동 대학원 정치리더십연구소 공동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 역 자 서율택

연세대학교를 졸업 후 『브리태니카대사전』 자연과학 분야, 『웅진학생백과사전』 사회과학 분야의 번역 및 집필에 참여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번역작가 및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자신있게 도전하라』『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 배웠다』『재치있게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 안절부절 상황에 휘말리는 사람』 등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대통령으로서의 성공 여부는 집권 후 반년 안에 판가름난다. 그만큼 취임 직후 6개월 안에 신속하게 국정을 장악하고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면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2002년 대선후보 경선이 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CEO 대통령의 7가지 리더십』이라는 책이 나왔다. 저자 데이비드 거겐은 지난 30년 동안 닉슨, 포드, 레이건, 클린턴까지 네 명의 대통령의 리더십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격한 사람이다. 리처드 닉슨에서부터 빌 클린턴까지 그리고 워터게이트에서 화이트워터까지.

이 책에서 저자는 닉슨, 포드, 레이건, 클린턴 대통령 시절 백악관에서 근무하면서 본 네 명의 대통령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여 이를 토대로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기 위한 7가지 리더십의 교훈을 정리했다. 그는 리처드 닉슨 백악관에서 서른 살에 대통령의 공보보좌관이 되어 워터게이트 폭풍의 한 중간에 서 있게 되었던 시절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이 책을 시작하고 있으며, 대통령으로서 닉슨, 포드, 클린턴이 실패하고 레이건이 성공한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밝히고 있다. 저자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망으로 개인적 일관성, 소명의식, 설득력, 다른 정치인과 협력하는 능력, 취임 초기의 순발력, 숙달된 참모진, 그리고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 등을 예로 들고 있다.

▣ 차례

제1부 리처드 닉슨

제2부 제럴드 포드

제3부 로널드 레이건

제4부 빌 클린턴

제5부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기 위한 7가지 교훈

CEO 대통령의 7가지 리더십

데이비드 거겐 지음/서율택 옮김

스테디북/2002년 3월/511쪽/18,000원

제1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리더십에 관한 책을 리처드 닉슨 얘기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고집스러운 집착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대통령 가운데 재임기간 중에 닉슨만큼 빈번하게 정적들의 도마 위에 올랐던 사람도 없었으며, 퇴임 후 역사가들로부터 혹평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1996년 아서 슐레진저는 서른여섯 명의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업적에 대한 총체적인 순위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는 치명적인 실정을 했던 율리시즈 그랜트 및 워렌 하딩과 함께 리처드 닉슨을 꼴찌로 낙점했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1974년 8월 9일 스스로 퇴진했다. 그러나 그의 퇴진으로 막을 내렸던 장기간의 전국적 소요는 미국인들의 뇌리 속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사건이 되었다. 또한 닉슨은 불명예를 영원히 안고 살아야 하는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

사실 사람들은 닉슨이 심하게 꼬였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 역시 심한 편견으로 인해 그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빌 클린턴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4 반세기 이상 이어졌던 정치 인생을 통해, 닉슨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강력한 리더로 존경받았다. 첫 번째 임기가 끝난 후 1972년 닉슨은 재선에서 60%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것은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그 당시 재선에서 1,800만 표라는 압도적인 표 차는 역사상 유래가 없었다. 20세기 정치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제외하면 대통령 선거전에서 다섯 번에 걸쳐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었던 사람은 오로지 닉슨뿐이었다. 선거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그처럼 후원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뭔가가 있었으리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도자로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갔고, 반면에 그렇게 낮은 곳까지 추락했다는 것 또한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닉슨은 모든 것을 얻었고, 그 모든 것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다. 훗날 그는 이렇게 불평했다. 나쁜 짓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실제로 파괴한 것은 정적들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칼을 쥐어 주었고, 그들은 그 칼로 나를 찔렀다.”

권력과 리더십의 혼동

과거 역사를 뒤돌아 볼 때 대부분의 사회는 하향식 전체주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인물들은 모두 원초적인 권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법을 천부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치열한 싸움에서 힘든 투쟁을 했고, 일단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한없이 무자비했다. 닉슨은 그들을 철저하게 연구했으며, 그들의 업적을 숭배했고, 민주적인 사회에 맞는 지도자의 모습을 갖추기보다는 그들의 모습을 모방하려고 노력했다.

닉슨이 백악관을 떠난 후 집필했던 책 중에 하나인 『리더(Leader)』는 그가 평생 동안 공부해 왔던 리더십들로부터 얻은 교훈을 담은 진지한 에세이이다. 이 책은 드골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위대한 사람이 없으면 위대한 업적도 없다.” 에세이를 엮어 가는 동안 닉슨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또 다른 구절들이 있다. 지도자는 “냉정하고 개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계산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일단 권력을 장악했으면 지도자는 권력의 사용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역사는 권리와 그 자체를 위해 권력을 열망했던 독재자들의 몫이었다. 그렇지만 정상에 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을 사용하여 이룰 수 있는 일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을 추구했고, 자신은 남들보다 그 권력을 훨씬 좋은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도자의 성격을 평가할 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매력이 아니라 유용성이다. 교활함, 허영심, 은폐 따위는 일반적으로 볼 때는 매력적이지 못한 성격이지만 지도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신판 마키아벨리 책의 서문에 있는 매스 러너의 글을 인용했다. ”명확한 사실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정치에서 이상과 윤리는 매우 중요한 규범이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무의미하다.“

이 문장들 가운데 완전히 잘못된 문장은 하나도 없다. 늘 그랬듯이 닉슨은 통찰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위의 글귀들을 종합해 보면 그의 정권을 몰락하게 만들었던 일련의 사고구조를 읽을 수 있다. 닉슨은 궁극적으로 리더십이란 ‘한 개인에 의한 권력행사’라고 보았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역사를 움직이는 여러 힘과 맞서며, 오직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위해 행동하는 위대한 개인의 권력행사라 믿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지지자들과의 관계는 부차적인 관심사였다. 지도자는 지지자와 함께 하기 위해 그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려줘야 하지만 또한 그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전통은 이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미국은 항상 상향식 사회였으며, 지도자의 권력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나왔다. 미국의 헌법은 “우리들, 미국 국민은”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또한 링컨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고 했다. 하지만 닉슨은 국민들을 철저히 불신했다. 그는 핵심적인 현안에 대해서조차 국민들의 지지를 결집시키기 위해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들만 알렸다. 국민들이 베트남전에 대한 안내를 촉구했을 때 소위 침묵하는 다수를 빌미로 그가 했던 일이 실은 이런 방식이었다. 그는 캄보디아 침공을 숨겼고, 미국이 패전했다는 사실조차 은폐하려고 했다.

닉슨이 진정으로 국민들의 판단을 신뢰했다면 1972년 6월에 그는 워터게이트 불법침입으로 이어졌던 그 사건의 잘못을 설명하기 위해 국민들 앞에 나섰을 것이다. 대신 그는 2년이 넘도록 워터게이트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이렇듯 닉슨은 미국적인 민주주의 전통과 거리가 멀었다. 대통령의 또 다른 주요한 의무, 즉 도덕적 리더십의 문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2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국민을 선한 삶으로, 즉 중용과 미덕, 명상으로 이끄는 것이 국가의 중심과제라고 설파했다. 과두제든, 민주제든, 그 둘의 혼합이든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는 같다. 그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치학』에서 논한 바 있듯이 정치 지도자는 “그들이 선택한 정체의 정신”을 국민들에게 교육해야 한다. “정치인은 시민들에게 도덕적 특징, 즉 도덕관과 도덕적 행위의 실천을 장려하는 문제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도자는 자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민의 도덕정신을 결집해 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대통령학 학자 어윈 하그로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대통령은 단순히 도덕적 법규를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모범을 정립하고 국민들이 그런 최고의 가치를 잊지 않도록 장려한다는 의미에서 도덕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은 도덕적 절대치로 국민을 억압하거나 차별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가치와 신념을 환기시킴으로써 국민들이 암묵적으로 그 같은 가치를 간직하고, 그것을 문제 해결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국 역사의 대부분을 돌이켜 보건대 최고의 대통령들은 그 같은 책무를 직관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화제의 최고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법률과 관습을 정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하지만 닉슨은 도덕에 대한 이야기는 했지만 정치에 도덕적 틀을 도입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헌법의 정신”을 국민들에게 교육하고, “도덕관과 도덕적 행동의 실천”을 장려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원초적인 권력 행사에 너무 미혹되어 있었고, 민주적 전통의 보존은 다른 사람의 몫으로 떠넘겼다.

제2부 제럴드 포드

1974년 가을, 리처드 리브스는 의회선거가 종반에 이르렀을 무렵 며칠 동안 신임 대통령을 따라 다니며 「뉴욕」지에 대통령에 대한 가혹한 비평기사를 썼다. 심지어는 ‘신사 숙녀 여러분, 미국의 대통령이십니다.’라는 제목으로 왕관을 쓰고 대통령 집무실에 앉아 있는 시골뜨기 사진을 합성해서 싣기도 했다. 리브스는 또 이렇게 썼다. “왕이 벌거벗었다는 말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문제는 왕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일년 후, 그는 자신의 책을 통해 한층 더 가혹한 비판을 퍼부었다. “포드는 굼뜨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또한 상상력도 없고, 의사도 분명치 못하다.” 그리고 「뉴욕」지에 실린 가혹하기 그지없는 합성사진은 곧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후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지켜보면서 리브스는 포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철회했다. 1997년 그는 『미국의 유산』이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미안해요, 대통령’이라는 제목 하에 그 동안의 정치와 저널리즘의 황폐화에 관해, 특히 공인들이라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대중매체의 성향에 관해 유감을 표시했다. 또한 포드에 관해 썼던 자신의 기사들이 언론의 부정적인 경향을 가속화하는 데 기여했음을 과감하게 인정했다. 때늦은 지혜의 힘을 빌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포드는 내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을 잘 했다. 그는 최선을 다했으며, 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다. 대통령께 나의 존경과 감사를 전하고 싶다.”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으로 재직했던 것은 겨우 895일로, 20세기의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가장 임기가 짧았지만 리더십에 관한 아주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그는 취임 후 처음 몇 주일 동안, 특히 첫 백일 동안 대통령의 능력을 입증하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특히 거대한 조직일수록 앞장서서 조직을 이끌어 갈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중요한 문제였다. 지도자가 성격상 채찍을 휘두르지 못한다면 누군가에게 채찍을 맡겨 말을 앞으로 달리게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어야 했다는 뜻이다. 일단 지침이 결정된 후에 대통령이나 백악관 팀이 확고한 추진력을 보여 주지 못하면 지도자에 대한 불신이 확산될 것이고, 그 같은 불신을 되돌려 놓는 데에는 엄청난 어려움이 따른다. 포드는 이런 점에서도 역시 문제를 노출시켰고, 이런 약점은 그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대권을 넘겨받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점은 집권 초의 그 많은 악재 속에서도 살아 남아 미국인의 존경과 감사를 이끌어 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그의 리더십은 긍정적인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선거를 통해 당선된 지도자들에게 정직의 가치를 재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진실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접착제와 같다.”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고, 매일같이 그 원칙을 증명했다. 또한 “너 자신이 아니라 너의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라.”는 유서 깊은 경구를 좌우명으로 삼아 자신의 행정부에 최고의 각료들을 포진시켰다. 그가 각료들을 생각만큼 잘 다루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근래에 드물게 유능한 행정부를 출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일요일의 깜짝쇼

1974년 9월 8일 일요일 아침, 포드가 집권한 지 정확히 30일째 되던 날 백악관은 한 마디 사전 언질도 없이 대통령 특별 담화를 발표하겠다며 기자들을 불러들였다. 이 담화는 백악관 내부에서 가장 신임받는 여섯 명의 보좌관들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언론은 무슨 얘기가 나올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11시 정각, 포드는 정권의 운명을 결정짓는 성명을 국민들에게 발표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나는 나 자신의 의사에 따라 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서자마자 여러분과 모든 미국 시민들에게 반드시 알려야 한다고 느꼈던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미합중국 대통령, 나 제럴드 포드는 헌법 제2조 제2항에 따라 사면의 권리가 허락되었고, 이 선물에 의하여 미국의 국익에 반해 리처드 닉슨이 저질렀거나 저질렀을지 모를, 혹은 연루되었거나 연루되었을지 모를 모든 범죄행위에 관하여 그 사람, 리처드 닉슨에 대한 완전하고 자유로운 그리고 절대적인 사면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포드가 공식 사면문서에 서명을 한 직후, 리처드 닉슨은 샌 클레멘트에서 사면을 받아들인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을 잘못 처리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교활하게도 법을 위반했다거나 은폐조작을 지시했다는 사실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닉슨은 변호사와 의논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얻어 냈다. 완전하고 충분한 사면과 범죄행위에 대한 부인, 녹음 테이프와 녹취록의 장기적인 비밀보장까지도 말이다.

닉슨의 공식 사면문서에 서명을 한 포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후에 있을 골프회동을 위해 집무실을 떠나 버닝트리 컨트리클럽으로 향했다. 그러나 첫 번째 공을 티에 올려놓기도 전에 온 나라를 휩쓰는 마른 날벼락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국민들은 사면 소식을 듣고 분노했던 것이다.

대부분 국민들의 뇌리에는 닉슨의 ‘토요일 밤의 대학살’(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가 백악관에 대해 닉슨 대통령의 녹음 테이프를 제출하라고 요구하자 백악관은 법무장관과 차관에게 콕스 검사의 해임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법무장관과 차관이 한꺼번에 해임되었던 사건. 의회는 이런 권력남용을 막기 위해 특별검사제를 입법화했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드의 “일요일 아침의 깜짝쇼‘에서 닉슨식 비밀주의와 야합적인 밀실정치의 악취를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면을 발표한 그 짧은 순간으로 인해 포드는 스스로 국민과 대통령을 이어 주던 실낱 같은 믿음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튿날 피츠버그에서는 첫 비난성명이 터져 나왔다. 일부 시위대는 “포드를 감옥으로, 포드를 감옥으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한 노동자는 공항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이렇게 대답했다. “오, 그건 너무 당연한 것 아니겠소. 포드는 닉슨에게 이렇게 말했을 거요. ‘당신이 내게 직업을 주면, 난 당신을 사면해 주겠소’라고 말이오.”

「뉴욕타임스」는 여론조사반을 현장으로 내보냈고, 71%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보였던 포드의 지지율이 하룻밤 사이에 49%로 추락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일로 인해 포드는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자신의 발목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차고 미국을 이끌어 가야만 했다. 그가 리처드 닉슨에게 베풀었던 새 삶이 결국 자신의 정치 생명을 단축시켰던 것이다.

제3부 로널드 레이건

버나드 맬라머드는 언젠가 한 야구선수의 이야기를 다룬 『내추럴(The Natural)』이라는 소설을 썼다. 그 책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했던 영화는 수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 속에서 그는 물 흐르듯이 세상을 살아가며 팀 동료들처럼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지만 영화가 절정에 이른 순간 통쾌한 장외 홈런을 터뜨린다. 역대의 다른 대통령들과 확연하게 비교될 수 있는 그 같은 본능과 직관을 타고났던 테오도어 루즈벨트나 프랭클린 루즈벨트처럼 로널드 레이건은 정치에 있어서 바로 그런 내추럴(타고난 천재)이었다. 두 명의 루즈벨트처럼 레이건도 남들 눈에는 어려워 보이는 일들조차도 쉽게 처리하는 마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레이건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세부적인 아주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몽상적이거나 부주의한 경향이 있어서 드라마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는 또한 1920년대 이래 정책 자체에 대해 가장 무관심한 대통령이었다. 일상 업무에서는 참모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너무 컸고, 그 때문에 결국 큰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균형감각을 가진 연구자라면 그의 정책에 대해 찬성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가 아주 유능한 대통령이었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내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로 백악관의 가장 탁월한 리더를 꼽는다면 단연 레이건이다. 지도자의 척도는 얼마나 많은 흔적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다. 신경제를 도입한 대통령, 냉전 종식에 기여했던 대통령, 정부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이 나라의 태도를 변화시킨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로 그처럼 긴 흔적을 남긴 대통령이 레이건 외에 누가 있었겠는가?

결정적인 순간의 리더십

3월 초, 그가 대통령 집무실을 차지한 지 여덟 주가 안 되어 우리는 레이건의 입지가 급격하게 약화되기 시작했음을 감지했다. 아무리 그 같은 상황을 막으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허니문 기간이 끝나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1981년 3월 30일 그에게 결정적인 전기가 찾아왔다. 이 결정적인 순간은 레이건 정권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그날 오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몇 블록 정도 떨어진 워싱턴의 힐튼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대통령이 저격을 당했다는 소식이 백악관으로 날아왔다. 세계의 모든 언론들은 그 사건이 발생하고 몇 분 안 되어 일제히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동시에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것이다.

비밀검찰부 요원 제리 파의 몸 아래 숨은 채로 대통령 전용 리무진을 타고 쏜살같이 조지 워싱턴 병원으로 후송되는 동안 레이건 자신도 총을 맞았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가벼운 상처를 입어 갈비뼈가 약간 아픈 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레이건은 자동차에서 나오면서 수행원들의 부축을 뿌리쳤고 본능적으로 상의 단추를 잠갔다. 그런 그의 모습은 대통령으로서의 감각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는 한 흐트러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나서 병원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쓰러지고 말았다. 총알이 심장 바로 옆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도 레이건은 물 흐르는 듯한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 그는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의사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당신이 철저한 공화당이길 바라오.” 또한 아내 낸시에게는 “허니, 내가 고개 숙이는 법을 잊어버려서 총을 맞았나 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레이건 정권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국민들은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레이건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전과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근로 계층의 사람들에게 이제 그는 총탄 세례까지 받은 대통령으로 인식되었고, 국민들은 그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그는 국민의 마음을 얻은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정책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심지어는 당장 몇 달 후에 경기침체가 찾아와 국민들 사이에 부정적인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조차도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헤밍웨이식으로 표현하여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도 “품위”를 보여 준 대통령이라는 그의 새로운 명성을 손상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취임 후 첫 7개월 동안 그는 말보다는 행동을 통해 국민들에게 강력한 이미지를 굳혔다. 국민들에게 일관성과 힘이 있는 고아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점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내적인 강인함을 갖고 있었으며, 국민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었다. 그는 용기가 있었고, 그의 말과 행동은 엄격한 원칙을 고수했다. 따라서 신념을 가진 지도자로 비춰질 수 있었으며,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핵심적인 신념체계에 대한 일관성

대부분 성공한 지도자들처럼 레이건도 집권 전에 이미 핵심적인 신념체계를 발전시켰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지만 수십 년간의 광포한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그 같은 신념체계를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그것은 진부하고 단순한 체계였지만 레이건은 여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신념을 갖고 있고, 그 신념을 고수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최종 목적지에 이르는 방법은 유연하게 바꿀 수 있지만 지도자는 궁극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반드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레이건 또한 집권기간 8년 동안 잠시 노선을 바꾸기도 했지만 항상 확고한 방향성을 유지했다.

레이건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선택받은 나라다. 둘째, 미국은 일등이어야 한다. 이등은 허용될 수 없고, 어느 나라에게도 뒤져서는 안 된다. 일등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미국의 힘만이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 넷째, 미국은 국민들이 노력과 상상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을 때, 즉 최대의 자유를 보장받을 때 비로소 강해진다. 다섯째, 미국의 실험은 개인의 자유와 전통적인 가치의 배양이라는 두 가지에 의지하고 있었다. 레이건 역시 어린 시절부터 그 같은 가치를 호흡하며 자랐으며, 줄곧 그런 가치들을 고수해 왔다. 그렇지만 그런 가치들은 현대 사회의 삶에 의해 얼마나 많이 파괴되고 있는가? 그는 그 같은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레이건의 핵심적인 사상을 요약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들이 너무 친숙한 것이라는 점에서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1970년대 후반기의 관점에서 미국인들은 광포한 군중들에게 지쳤으며, 전통적인 가치의 회복을 열망하고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레이건은 그 같은 시대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대변해 주었다. 나아가 자신의 믿음을 일관되게 견지함으로써 사람들은 레이건 자체가 그 자신의 신념과 동의어라고 믿게 되었다. 사상과 개성이 융화됨으로써 지도자로서는 더없이 강력한 무기를 얻었던 것이다.

대중적인 의미를 재해석하는 탁월한 능력

케슬린 홀 제이미슨은 『전자시대의 웅변』이라는 책에서 당시에 내가 주목하지 못했던 레이건의 연설 내용을 크게 부각시켰다. 사실 오늘날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공동체적인 경험은 대부분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서 보는 시각적인 영상에서 비롯된다는 점이었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레이건은 자신의 연설 속에서 그런 공통의 시각적 경험을 불러 내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 경험들을 다시 삶에 적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가미시켰다. 공보보좌관이었던 나는 레이건이 스크린에 나오는 스토리를 즐겨 얘기하는 것은 그의 배경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라고 치부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리고 제이슨의 분석을 접하고 나서야 나는 그 같은 접근법이 갖는 힘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해석의 달인으로 거대한 사건의 의미를 대중적인 의식에 맞추어 훌륭하게 재해석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가장 통렬한 예는 챌린저호 사건이었다.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는 1986년 1월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에서 발사된 직후에 공중 폭발했다. 탑승자는 여섯 명의 미국인과 우주비행을 위해 선발된 최초의 학교 선생님 크리스타 맥올리프였다. 맥올리프는 아이들을 위해 “인간적인” 우주를 만들고 싶어했고, CBS와 「뉴욕타임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40%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에서 생중계로 발사 장면을 시청했다고 한다. 전례 없이 생생한 화면으로 포착되었던 폭발 장면은 강력한 국민적인 슬픔을 촉발시켰다. 이에 레이건은 최고의 연설문 집필 보좌관이었던 페기 누넨과 함께 난국을 수습해 나갔다. 무엇보다 그는 어린 학생들을 위로해 주어야 했다.

“나는 이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이것은 탐구와 발견을 위한 과정의 일부입니다. 인류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를 잡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미래는 겁쟁이들의 몫이 아닙니다. 오로지 용감한 자들의 몫입니다. 챌린저호의 승무원들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하고 있고, 우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라갈 것입니다.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승무원들은 그들이 살았던 삶의 방식을 통하여 우리를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그리고 그들을 보았던 마지막 순간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주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손을 흔들며, 굳건한 대지를 차고 올라 하나님의 얼굴을 어루만졌던 이 아침을.”

그날 밤, 레이건의 연설이 재방송될 때 NBC는 그가 마지막 말을 하는 순간 손을 흔드는 챌린저호의 탑승인들의 모습을 방영했다. 그 같은 영상과 교전 중인 미국 전투기를 소재로 했던 존 길레스피 매기의 시 <고공비행>에서 차용한 구절을 짜 넣음으로써 그는 그들의 비행을 인간 승리의 순간으로 불멸의 생명을 주었다. 지도자는 국민적인 슬픔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제4부 빌 클린턴

빌 클린턴은 그야말로 모순덩어리였다. 그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영민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인 동시에 가장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기도 했다. 클린턴은 전임 대통령들의 치세에 대해 탁월한 역사적 식견을 갖고 있었지만 역사적인 교훈을 경시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는 스스로 약속했던 것처럼 진정으로 “역사상 가장 도덕적인 행정부”를 만들려고 했지만 최초로 의회의 탄핵을 받은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로 민주당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었지만 트루먼 이후로 재임기간 중에 양원을 모두 야당에게 넘겨준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는 부인에게 애착을 갖고 매일 사랑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거듭해서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또한 클린턴은 오랫동안 그를 숭배하는 폭넓은 충성파 집단을 형성했고 자신의 동지들을 누구보다 잘 보살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는 사람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무자비하게 버리는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클린턴은 영원한 패러독스다. 그가 진을 거두고 먼지가 가라앉고 난 후에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며 숱한 추문에도 불구하고 처음 집권할 때보다 미국을 훨씬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놓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미국은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매우 실질적인 성장을 했다. 미국은 1990년대에 들어 20세기 중에 가장 밝은 시기를 맞았으며, 클린턴은 그 주된 동력 중에 하나였다. 그는 이런 점에서 영원히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권에 대해서는 쓰라린 실망감을 숨길 수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룩했든, 얼마나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든.

클린턴의 리더십과 실패의 원인

클린턴은 자신의 약점에서 영구적인 선거전 체계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윤리적 실책에 대해, 그리고 회피를 위해서도 거짓말을 했다. 기사의 사전조율에 대한 의존까지 더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일관된 맥락이 클린턴 시대를 관통해 왔다. 그것은 1998년 클린턴의 도덕적 권위가 붕괴됨으로써 끝이 났다.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관계와 뒤이은 거짓말들이 들통남으로써 지도력과 명분이 추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의회와 언론을 비롯한 다른 권력 중심으로부터 표출된 분노의 폭발은 또한 여러 해 동안 축적되어 왔던 강력한 반발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클린턴을 지지했고, 집권 2기의 클린턴에 대한 지지율은 심지어 레이건을 능가했지만 벨트웨이 사람들은 그에게 넌더리를 쳤다.

1960년대에 노이스탯이 했던 말이 정곡을 찌른다. 대통령의 힘은 대중적인 인기와 그리고 전문가적인 명성에 의존한다는 것. 통치를 하기 위해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하지만 또한 반드시 워싱턴 정가에서 명성을 얻어야 한다. 클린턴은 한 가지는 성취했지만 다른 한 가지는 그렇지 못했다. 그럼으로써 지도력을 상실한 것이다.

워싱턴 바깥에 사는 사람들은 워싱턴 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쉽게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반드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워싱턴에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일련의 이상을 갖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하거나 간에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또한 워싱턴은 본질적으로 한 마을이나 다름없으며, 단 하나의 기관, 즉 백악관만이 그 중심 광장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워싱턴 사람들은 자녀들이 자신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를 바라는 만큼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영예로운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새로 온 사람들이 터줏대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그들의 규칙을 깨려고 한다면 설사 그가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클린턴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다. 1998년 샐리 퀸이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했던 한 편의 기사는 클린턴 부부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 테지만 이러한 워싱턴의 정서를 잘 포착했다.

그녀가 인터뷰를 했던 백 명의 워싱턴 사람들 중에 백악관 출입기자단 대표인 데이비드 브로더는 이렇게 말했다. “클린턴은 이곳에 와서 그 자리를 망쳤고, 이곳은 그가 있을 곳이 아니다.” 국내 정치에 대해 클린턴에게 자문을 했으며, 널리 명성이 알려진 교수 출신의 빌 갤스턴은 또 이렇게 말했다. “워싱턴 사람들의 대부분은 존경할만한 사람들이며, 옳은 일을 하려고 한다. 이들은 클린턴의 행동이 지극히 정상이고, 모든 워싱턴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비춰진다는 것은 평생 동안 갖고 있던 영예로운 공직생활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이 더렵혀지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여기에 더해 나는 워싱턴의 규칙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둥지를 더럽히지 말라.”

그의 정권을 돌이켜 보건대 클린턴은 자신을 위해서도 너무 일찍 대권을 얻었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결심하고 내 집으로 전화를 걸었던 1991년 어느 날 밤, 그의 목소리는 결코 승리에 대한 확신에 차있지 않았다. 그 당시 클린턴의 계산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1992년에 있을 선거는 워밍업에 불과하고 먼 길을 가기 위한 티켓을 얻고 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았던 것은 확실하다. 틀림없이 그는 마리오 쿠오모가 민주당 후보지명전에 가세하면 쿠오모가 근소한 차로 승리를 하여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이고 최종 선거에서 부시에게 패배할 것이다. 그런 다음 1996년 선거전에서는 그 결과를 토대로 이런 논리를 구성했다. 먼데일과 마이클 듀카키스, 쿠오모, 이 세 사람의 후보가 구시대의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민주당을 연패로 몰고 간다. 이쯤 되면 신민주당 시대가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이미 공화당 대통령에 싫증이 났을 테고 그러면 자신이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되면서 국민들에게 구체적인 정치일정을 승인받을 수 있다.

그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었다면 그는 훨씬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1996년까지 클린턴은 내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4년이라는 시간을 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보다 튼튼한 지반 위에 설 수 있었을 테고 보다 자제력을 기를 수 있었을 것이며, 벼랑 끝으로 걸어 가려는 충동도 훨씬 잦아들었을 것이다. 아마 힐러리와의 관계도 훨씬 균형 있는 관계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그들의 사생활이 공적인 활동에 미치는 파멸적인 영향력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그는 대통령의 권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더 많은 고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5부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기 위한 7가지 교훈

1996년 아서 슐레진저는 부친이 시작했던 전통에 따라 32명의 동료 역사학자들에 대한 설문을 바탕으로 역대 대통령에 대한 점수를 매겼다. 워싱턴과 링컨,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또 다시 수위를 달렸으며 제퍼슨과 잭슨, 포크, 테오도어 루즈벨트, 윌슨, 트루먼은 “위대함에 근접한 대통령”으로 간주되었다. 놀라운 점은 트루먼 이후로 대통령들의 몰락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트루먼의 뒤를 이은 세 사람의 후임자들, 아이젠하워와 케네디, 존은 고작해야 “중상위” 점수를 기록했다. 그 후로 나머지 여섯 명의 대통령은 중하위를 기록했다. 포드와 카터, 레이건, 부시, 클린턴은 “평균 이하”의 점수를 기록했고, 닉슨은 “실패자”로 낙인찍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왜 우리는 최근의 대통령들로부터 리더십에 관한 교훈을 얻어야 할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하나의 나라를 이끌어 나간다는 것은 훨씬 고단한 일이 되었다.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무한히 많아졌지만 행동의 폭은 훨씬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백악관은 세계에서 최소한 여섯 군데 이상의 분쟁지역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하고, 세계 경제의 원활한 흐름을 도와야 하며, 나아가 테러와 폭력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뭔가가 잘못될라 치면 굶주린 언론들의 무자비한 추적이 시작된다. 또한 의회의 당파주의자들은 내각의 각료들을 줄줄이 의사당으로 호출할 것이다. 게다가 로비스트들은 대중적인 캠페인을 조직하여 대통령의 행동을 막기 위해 수백만 달러의 돈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현대의 대통령들을 연구해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떤 정책적 목표가 효력을 발휘했고, 어떤 정책이 실패했으며, 그 후임자들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찾아 내야 하는 것이다.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미래를 정복하는 필수적인 요건이기 때문이다.

① 리더십은 안으로부터 시작된다

지난 30년 동안 가장 재능 있는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리처드 닉슨과 빌 클린턴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남달리 총명했으며 풍부한 독서를 했고 정치적 감각이 가장 탁월했던 인물들이었다. 또한 두 사람은 똑같이 권력을 만끽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자기 정권의 몰락을 초래한 장본인이었다. 닉슨은 자기 안의 악마를 밖으로 불러 냈으며, 클린턴은 스스로 인격의 도덕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그들은 지도자로서 세상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부단한 자기 관리를 통해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개인적 차원의 인품을 넘어 국가의 수장으로서 대통령은 정치학자 에러릿 칼 래드가 정의했던 바 고급한 “대통령으로서의 지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 통치자로서의 지적 능력이란 지식과 판단력, 감수성, 미래에 대한 신념의 절묘한 융합을 뜻하며, 이러한 능력은 현명한 의사결정과 책임 있는 리더십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세계와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면 그것 또한 위험한 일이다. 그렇지만 지적 능력만으로 따지면 오늘날의 대통령 중에 닉슨과 카터, 클린턴이 최고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오히려 레이건에서 보았듯이 적성과 감성, 지능의 결합이 대통령으로서의 능력에 대한 훌륭한 예측지표가 될 수 있다.

② 정책 목표를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

대통령은 강인한 품성을 갖춰야 하는 만큼 명확한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 나라를 향해 반드시 그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얘기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자신의 깃발 아래 모을 수 있어야 한다. 링컨의 목표는 미합중국의 분열을 막는 것이었고,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목표는 대공황을 종식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다. 즉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단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중심 과제는 나라의 핵심적인 가치체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그러한 가치체계는 바로 독립선언문에서 찾을 수 있다. 체스터톤(G. K. Chesterton)의 유명한 지적처럼 “단 하나의 신념을 토대로 수립된 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미국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념은 독립선언문을 통해 교리처럼 혹은 신학처럼 명료하게 제시되었다.”

③ 설득력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

케네디와 레이건은 20세기 후반의 가장 뛰어난 연설가로 국민들의 마음 속에 각인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새로 등장한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텔레비전을 통해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레이건의 경우에는 그 능력을 자신의 입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통령이 텔레비전에서 수다라고 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대중들이 외면하고 있다. 조지 부시의 대중연설 회수는 실제로 레이건보다 많았고, 클린턴은 두 사람을 합한 것보다 더 많았다. 1997년 한해 동안 545회나 대중연설을 했다. 클린턴은 대체로 복잡한 정책을 대중들과의 관계 속에서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하는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빈번한 대중 노출은 오히려 설득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효과가 미미했다.

④ 국민, 의회, 언론과 협력해야 한다

오늘날의 정치평론가들의 공통된 잘못 중 하나는 통치행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대중에 대한 설득력뿐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은 지도력 확보의 소중한 도구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레이건의 성공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대통령과 백악관 팀이 민주주의 체제의 다른 요소들과 효율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대중과 의회는 똑같이 중요한 국가기구이며, 언론 또한 민주주의의 중요한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이 그 같은 거미줄 망의 중심에 서 있는 행위자의 하나라고 인식해야 한다. 대통령의 주변에는 각기 다른 제도적 세력들이 포진해 있으며, 협력을 통해서든 개인적인 매력을 통해서든 아니면 설득을 통해서든 대통령은 그들과 성공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국민과 의회, 언론이 물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⑤ 취임 즉시 정책 추진에 돌입해야 한다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리더의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진다. 기업의 최고경영자나 대학의 총장, 노동조합의 조합장은 장기적인 업무수행 능력의 자질을 통해 지위가 결정된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그와 정반대다. 대통령의 힘은 순식간에 증발한다. 대통령은 취임 직후 6개월 안에 신속하게 국정을 장악하고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면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 즉 의회의 휴회기간까지의 기간이 일반적으로 그가 앞으로 갖게 될 가장 폭넓은 기회의 창이 된다. 이것이 바로 대통령이 발빠른 행보를 해야 하는 이유이다.

⑥ 유능하고 신중한 참모를 등용해야 한다

대통령은 자신의 주변에 최고의 보좌관들을 포진시켜야 한다. 링컨이 선거가 있던 날 밤에 바로 했던 일은 각료 후보자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이 명단에 기초하여 그는 워싱턴에 버금가는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테오도어 루즈벨트, 프랭클린 루즈벨트, 해리 트루먼, 이들도 모두 매우 유능한 보좌관들로 둘러싸여 있던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내가 봉사했던 대통령들 중에 레이건은 가장 탁월한 백악관 팀을 운영했고, 포드는 최고의 내각을 구성했다. 두 사람의 리더십에 관한 역학의 차이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⑦ 과업 수행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고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죽자 그의 리더십에 관한 불후의 명작 가운데 하나가 집필되었다. 역사학자 윌리엄 로치텐버그는 이 책에서 루즈벨트 이후에 적어도 여덟 명의 대통령이 그의 그늘 속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실제로 그 후임자 가운데 세 사람, 트루먼과 케네디, 존슨은 민주당이었고, 그들은 의도적으로 뉴딜의 완성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다.

아이젠하워와 닉슨은 공화당이었고, 그들은 뉴딜을 승인하고 그 정책을 계승했다. 사실 닉슨은 여러 측면에서 마지막 뉴딜 대통령이었다. ‘위대한 사회’ 정책을 거부했던 레이건조차도 자신의 첫 정치적 영웅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업적을 훼손시키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그의 리더십 스타일 가운데 많은 부분을 수용했다. 이것은 곧, 유능한 대통령은 살아 있는 신화를 만들었으며, 자신들이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추종자들이 자신의 과업을 이어가도록 고무시킨다는 점을 알려 준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통령들 가운데 오로지 레이건만이 그와 같은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의 정치 환경은 대통령이 집권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창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어 있다. 어쩌면 지금은 붕괴시켜야 할 낡은 권위조차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또한 어떠한 하나의 사상도 지배적인 지위를 획득하고 있지 못하다. 변화의 바람이 너무도 거세게 불고 있어서 유권자들은 미래를 향한 명쾌하고 굳건한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를 열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열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대통령들은 아마도 살아 있는 신화를 남길 수 있는 장본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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